| 최단기간 만리장성 종주 사진
2005년 9월 23일 중국 감숙성 서쪽의 가욕관 제1동에서 출발하여 2006년 2월 4일 하북성 동쪽 산해관까지 만리장성 5,000km를 135일 만에 대한민국 사람으로는 최초로 도보 종주하였다.
- 에필로그(만리장성 종주 기행문 중 발췌) -
아래 에필로그는 도전자 스스로가 작성한 것이며 한국기록원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 또한 나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중에 하나인 것 같다.
처음에는 나도 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글쓰기 시작하자 바로 말문이 막혀 버리고 만다. 다행히 내가 만리장성을 지나온 기록 사실 그대로를 남겨서, 또 다른 이 들의 도전에 대한 하나의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글을 쓰게 되었다.
처음 출발 당시에는 나도 무척 걱정과 미지의 세계 에 대한 보이지 않는 공포를 느끼기도 했으며, 대한항공에 근무하는 산악회 친구가 며칠간 동행 해 주었고, 친구가 한국으로 되돌아갈 때, 북경에 있는, 산동출신 친구가 기록을 도와주기 위해 지도와 숙박지를 맡아서, 내가 지나 가야 할 지역을 나 대신 미리 준비해 주는 역할을 약 한달 반 동안 다니면서, 기록에 도움 될 수 있도록, 별도의 기록을 적어 놓았지만, 그것 조차도 자세하게 기록하지 않았음에 실망을 했지만 나의 잘못이 먼저인 것 같다.
장성 종주를 마치자 마자, 한국에서, 글을 쓰기 시작 하면서, 예전에 근무했던 회사 직원이 내가 찍어온 비디오 테잎을 CD로 변환 시켜주는 기간 동안 조용히 글을 쓰기 위하여, 준비 중에 예전 회사 사장님의 제의에 제주도 신도시에서, 방을 6개월간 얻어서, 그곳 사무실에 잠시 근무 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회사에서 급한 연락이 와서, 미국에 있던 지사에 큰 문제가 발생하여, 회사의 위기가 닥쳐, 예전에 모셨던 사장님의, 일생 일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제주도에서, 서울로 도착 하면서, 다음날 아침에 영문도 모른 상황에서, 전무이사님과 함께, 미국 뉴욕 행 비행기를 타야만 했었고, 그곳에서, 급하게, 법적으로, 지사가 이탈 되면서, 발생하는, 어려운 상황에 동참하여, 전무님은 일주일 후에 되돌아 가시고, 혼자 남아, 새롭게 맨하탄 브로드웨이에, 사무실 및 법인체 설립을 위하여, 남아서, 일 처리를 도와 드리면서, 새로운 지원들의 도움으로, 약 5개월 간 어느 정도 기반을 만든 후, 미국을 떠나 한국으로 되돌아 와, 다시 자료 정리를 해야만 했다. 그러던 중, 운이 나빠서인지 비디오를 CD를 분실하는 사건이 생겼다. 변환작업을 도와 주었던, 사장님의 처남에게, 감사를 표현하지 못한체
솔직히 만리장성을 종주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답사를 하는 것만 해도 아마 최소한 만리장성을 종주하는 배 이상의 노력과 투자가 따를 것이다. 시간과 자본이 부족한 나로써는 무척 열악한 조건이 아닐 수 없었다. 혼자서 걷는 여행? 한번 상상해 보면서, 일단은 언어에 대한 기본적인 감각을 익히기 위해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횟수는 길었지만, 약 8개월을 꾸준하게 다닌 셈이 된다. 학교를 다니면서 시간 나는 데로 자료를 모으기 시작 했다. 그러면서 만리장성과 관련된 여러 유명인을 직접 만나러 갔었다. 그 중 2분을 소개 하고자 한다.
한 분은 1987년 중국 만리장성을 외국인으로써 최초로 걸었다는 영국인 윌리엄 린드세이를 북경시내 어느 조그만 커피숍에서, 만나서 나의 계획을 보여주고 조언을 받았는데, 가장 걷기 좋은 최 적기는 9월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그래서 일단 결정하였다. 중국인 안내인 없이 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으니, 현지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이다. 라는 여운을 남긴 채 우리는 헤어져야만 했다.
또 다른 한 분은 중국 건국 50주년 기념행사를 위해서 만든 만리장성 과 중국 내에 있는 모든 장성의 역사와 기록을 남겼던, 중앙방송 1채널 사회자 초건성 이란 분을 만나서, 만리장성의 계획에 대해 여러 가지를 알아 보았다. 시간과 자본이 부족한 나로써는 상상하기 힘든 일 이었지만,한번 도전 해 보기를 희망했다.
다행히 중국에서 어려울 때 마다, 나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분들이 나에겐 무척 큰 힘이 되었다.
직업적으로 중국을 왕래하다가 2002년 초에 2008년 올림픽 개최지 선언 발표 확정에 따른 자축 행사를 보면서, 또 하나의 새로운 시대가 도래한 중국의 저력을 느끼면서, 나는 한국인으로써, 과연 얼마만큼이나 중국에 대해서 알고 있는가? 에 대한 의문과 함께 많은 외국인들이 시도 했던 장성종주는 한국인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에 대한 하나의 한국인의 긍지를 심어 보자는 뜻에서, 살아 있을 때, 일생에 한번쯤은 보람된 일을 해보자는 견지에서 종주를 해야겠다는 결정을 보았다. 이후에 회사를 그만 두고 바로 중국에 가서, 언어를 배우기 시작 했다. 그런 후에 출발 하게 되었다.
첫 출발 시 며칠간을 항공사에 근무하는 친구가 같이 걸었다. 답사가 확실치 않았던 나로 인해서 우린 여러 시행착오를 하게 되어 평균 거리보다 많은 거리를 오가며, 장성의 발자취를 찾아 다녔다.
그 친구는 답사 없이 만리장성을 추적 한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며, 힘들어 하면서도, 첫 출발지에서, 비박 부터 시작하여, 휴가 기간 일주일을 할 애 한 후, 되돌아 갔고, 북경에 있는 산동사람인 소통이라는 친구가 내가 가야 할 지역을 답사 겸 숙박정보를 47일간 도와 주었고, 마지막 청화 대학에서 한어를 아르키는 팅리 선생님이었던 마 선생님이 25일간 마지막 마무리를 도와 주었고, 나머지는 스스로 해결 했다.
원래는 한나라 장성의 시작 되는 곳이며, 실크로드의 출발지인 옥문관(玉門關) 이나, 양관(陽關) 에서 시작 할 계획이었는데, 열흘간 물을 만나지를 못한다는 정보를 듣고, 일단 물을 해결 할 수 있는 방법에서 낙타 1마리를 인민폐 3000위엔을 주고 구했는데, 막상 출발 할려고 양관에서 낙타를 픽업 했는데, 낙타 다루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결국은 낙타를 되돌리고, 다음날 돈황에서, 오전 11시 기차를 타고 가욕관으로 이동하여, 오후가 되어서 제1동에서부터, 걷기 시작 했다. 명나라 장성의 시발점인 서쪽 가욕관(嘉峪關) 제 1동을 거쳐서, 마지막 관문이며, 동쪽의 첫 관문인 발해만의 산해관(山海關)에 이르기 까지, 감숙성(甘肅省), 녕하성, 내몽고성, 섬서성, 산서성, 하북성, 북경시, 하북성 순서대로 이동을 하게 되었다.
출발 전에 느낌은 살아 돌아오기가, 어려운 것 같아서, 부모님께 효도 제대로 못한 나로써는 가슴이 아팠다. 혹시 어떤 일을 당할지 몰라, 후2개의 보험도 가입하고, 출발했다. 미지의 세계는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과연 나같이 일반적인 사람도 이 여행을 마칠 수 있는지? 여지껏 살면서, 거듭난 실패에 대한 좌절을 이 여행을 통해 자기수양을 닦아서, 과연 스스로를 극복 할 수 있는지? 결국 나 자신과의 싸움이 시작 될 것 이다.
과연 거친 풍랑을 연약한 인간으로써, 이겨낼 수 있을 것인가? 살아야겠다는 욕망과 신념으로 극복 할 수 있을 것인가? 태어나서 결국은 우린 누구나 다 헤어 져야만 한다면, 살아가면서 만난 좋은 인연의 얼굴들을 가슴 깊이 간직한 체 남아있는 삶의 한 순간 이라도, 알 수 없는 미래를 위해 도전해보는 즐거움을 갖고 싶었고, 앞으로 어떤 어려운 시련을 만나도 극복 할 수 있는 의지의 신념을 키우기 위한, 나 자신과의 싸움이 시작 될 것 이다.
이 길을 가면서, 효의 근원을 늦게나마 깨달을 수 있다면, 어떠한 어려움도 마다하지 않을 것 이다.
끝으로, 항상 음양으로, 자식의 안위를 걱정하여, 기도해 주시는, 부모님과 양미자 이모님께 감사 드리고, 인연이 닿아 만나서, 항상 염려 해주는 누님과 형제, 그리고 친구들의 호위에 감사 드리며, 후원해주신 황두연사장님, 그리고 양화루, 이문석, 김일, 등등 여러 사장님들의 지원에 감사 드리며, 음양으로 개인시간을 할애하여 도와준 친구 최학용, 소통, 마선생, 이희철, 전영남, 신주호, 박동관, 이성철부장, 그리고 지나가다가 어려울 때 마다, 도와 주었던 지역 사람들께 감사를 드린다.